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18

어머니 / 오 세 영

그림/ 김 계 희 ​ ​ ​ 어머니 / 오 세 영 ​ ​ ​ 나의 일곱 살 적 어머니는 하얀 목련꽃이셨다. 눈부신 봄 한낮 적막하게 빈 집을 지키는, ​ ​ 나의 열네 살 적 어머니는 연분홍 봉선화꽃이셨다. 저무는 여름 하오 울 밑에서 눈물을 적시는, ​ ​ 나의 스물한 살 적 어머니는 노오란 국화꽃이셨다. 어두운 가을 저녁 홀로 등불을 켜 드는, ​ ​ 그녀의 육신을 묻고 돌아선 나의 스물아홉 살, 어머니는 이제 별이고 바람이셨다. 내 이마에 잔잔히 흐르는 흰 구름이셨다. ​ ​ ​ 오세영 시집 / 시는 나에게 살라고 한다 ​ ​ ​

창문 앞에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창문 앞에 / 이 효 ​ 텅 빈 마음이 싫어 창문 앞에 꽃을 내어 놓는다 창문 앞에 꽃을 내어 놓는 것은 나의 마음을 여는 것 ​ 세상이 온통 흑백 사진 같을 때 나는 매일 아침 창문 앞에 꽃을 내어 놓는다 세상 사람들 미소가 하늘에 맑은 구름처럼 걸릴 때까지 ​ 이제껏 사는 게 너무 바빠서 창문 앞에 꽃 한 송이 변변히 내어 놓지 못했다 창문 앞에 꽃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일 ​ 창문 앞에 꽃을 내어 놓는 일은 마음에 별을 하늘에 거는 일이다 ​

결혼에 대하여 / 정호승

그림 : 오순환 ​ 결혼에 대하여 / 정호승 ​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깎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깎아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 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 권의 시집..

겨울 등불 (자작 시)

겨울 등불 / 이 효 저 붉은 장미 운다 울고 있다 무슨 할 말이 남았을까 하얀 망사 쓰고 서성인다 시집 한 번 갔다 왔다고 바다가 섬이 되는 것도 아닌데 가슴에 푹푹 찬 눈이 쌓인다 새 출발 하는 날 길이 되어준다는 사람 앞에서 뜨는 별이 되어라 자식 낳고 잘 살면 된다 돌아가신 할머니 말씀 환하다 창밖에 눈이 내린다 살다가 힘들면 가시 하나 뽑아라 속없는 척 살면 되지 몸에 가시가 모두 뽑히면 장미도 겨울 등불이 된다. 등불은 또 살아있는 시가 된다.

지금은 우리가 / 박 준

지금은 우리가 / 박 준 그때 우리는 자정이 지나서야 좁은 마당을 별들에게 비켜주었다 새벽의 하늘에는 다음 계절의 별들이 지나간다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 경희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수상: 2013 제31회 시동엽문학상 시 부문 시집: 시가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줄 것이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들국화가 되련다 (자작 시)

들국화가 되련다 / 이 효 새벽 산에 오르니 산등선에 칼바람 맞고 우뚝선 들국화야 벗들은 담장 아래서 물드는데 너는 무엇이 그리워 동물 울음 소리 삼키며 먼 산 지키고 있니? 밤하늘 수천개의 별들과 나누는 사랑이 잣나무 사이로 빗겨온 세월을 삼키면서까지 지킬만 하더냐? 능선위에 들국화야 오늘밤 떨지 말아라 푸른 하늘에 배띄워 깃털같은 구름 이불 덮고 가을 산에 함께 누워보자꾸나 들국화는 별이되고,나는 들국화가 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