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노을 9

수직의 무게 / 이 효

진도 수직의 무게 / 이 효 도시의 실핏줄 터트리고 달려온 남해 품을 내어준다 모래사장에 벗어 놓은 신발은 하루 끈을 느슨하게 푼다 한평생 리모컨이 되어 가족이 누른 수직의 무게로 인생의 물음표와 마침표를 견뎌야 했던 남자 치매 걸린 노모의 수다는 푸른 바다를 붉게 물들인다 껍질 벗겨진 전선줄 천둥소리에 뼈대 하나 남긴다 코드가 헐거워진 저녁 남자 닮은 노을 하나 혼신을 기울여 통증의 언어를 잠재운다

지친 그대여 / 안재식

그림 / 최원우 지친 그대여 / 안재식 노을마저 숨어버린 북악산에 그래도 아우성치는 풀꽃을 보시라, 둘러보면 서럽지 않은 사랑 어디 있으랴 억울하지 않은 이 뉘 있으랴 삶이란, 왕복표 없는 단 한 번뿐인 낯선 길 설레는 여행이기에 세상은 살 만한 것이거늘 칠흑의 정원에서도 꽃눈 틔우려 아우성치는 저, 성스러운 소리 그 끈기를 들어보시라 *한국문인협회 편집위원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동인 *중랑문학대학 출강

그 사랑에 대해 쓴다 / 유 하

그림 / 김 정 수 ​ ​ ​ 그 사랑에 대해 쓴다 / 유 하 ​ ​ ​ 아름다운 시를 보면 그걸 닮은 삶 하나 낳고 싶었다 노을을 바라보며 노을빛 열매를 낳은 능금나무처럼 ​ 한 여자의 미소가 나를 스쳤을 때 난 그녀를 닮은 사랑을 낳고 싶었다 점화된 성냥불빛 같았던 시절들, 뒤돌아보면 그 사랑을 손으로 빚고 싶다는 욕망이 얼마나 많은 열정의 몸짓들을 낳았던 걸까 그녀를 기다리던 교정의 꽃들과 꽃의 떨림과 떨림의 기차와 그 기차의 희망, 내가 앉았던 벤치의 햇살과 그 햇살의 짧은 키스 밤이면 그리움으로 날아가던 내 혀 속의 푸른 새 그리고 죽음조차도 놀랍지 않았던 나날들 ​ 그 사랑을 빚고 싶은 욕망이 나를 떠나자, 내 눈 속에 살던 그 모든 풍경들도 사라졌다 바람이 노을의 시간을 거두어 가면 능금나무..

어제 / 천 양 희

그림 / 이 상 표 ​ ​ ​ ​ 어제 / 천 양 희 ​ ​ ​ 내가 좋아하는 여울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왜가리에게 넘겨주고 내가 좋아하는 바람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바람새에게 넘겨주고 ​ 나는 무엇인가 놓고 온 것이 있는 것만 같아 자꾸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 너가 좋아하는 노을을 너보다 더 좋아하는 구름에게 넘겨주고 너가 좋아하는 들판을 너보다 더 좋아하는 바람에게 넘겨주고 ​ 너는 어디엔가 두고 온 것이 있는 것만 같아 자꾸 뒤를 돌아다본다 ​ 어디쯤에서 우린 돌아오지 않으려나보다 ​ ​ ​ 천양희 시집 /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 ​ ​ ​

소풍 / 나 희 덕

그림 / 김 한 솔 ​ ​ ​ ​ 소풍 / 나 희 덕 ​ 얘들아, 소풍 가자. 해지는 들판으로 나가 넓은 바위에 상을 차리자꾸나. 붉은 노을에 밥 말아먹고 빈 밥그릇 속에 별도 달도 놀러 오게 하자. 살면서 잊지 못할 몇 개의 밥상을 받았던 내가 이제는 그런 밥상을 너희에게 차려줄 때가 되었나 보다. 가자, 얘들아, 어서 저 들판으로 가자. 오갈 데 없이 서러운 마음은 정육점에 들러 고기 한 근을 사고 그걸 싸서 입에 넣어 줄 채소도 뜯어왔단다. 한 잎 한 잎 뜯을 때마다 비명처럼 흰 진액이 배어 나왔지. 그리고 이 포도주가 왜 이리 붉은지 아니? 그건 대지가 흘린 땀으로 바닷물이 짠 것처럼 엄마가 흘린 피를 한 방울씩 모은 거란다. 그러니 얘들아, 꼭꼭 씹어 삼켜라. 그게 엄마의 안창살이라는 걸 몰라도..

9월도 저녁이면 / 강 연 호

그림 / 정 경 혜 ​ ​ ​ ​ 9월도 저녁이면 / 강 연 호 ​ ​ ​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 ​ ​ 시집 /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 ​ ​ ​ ​ ​

세상에 나와 나는 / 나 태 주

그림 / 소 순 희 ​ ​ ​ 세상에 나와 나는 / 나 태 주 ​ ​ 세상에 나와 나는 아무것도 내 몫으로 차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 꼭 갖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 푸른 하늘빛 한 쪽 바람 한 줌 노을 한 자락 ​ 더 욕심을 부린다면 굴러가는 나뭇잎새 하나 ​ 세상에 나와 나는 어느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으로 간직해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 꼭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단 한 사람 눈이 맑은 그 사람 가슴속에 맑은 슬픔을 간직한 사람 ​ 더 욕심을 부린다면 늙어서 나중에도 부끄럽지 않게 만나고 싶은 한 사람 그대. ​ ​ ​ 나태주 시집 / 혼자서도 별인 너에게 ​ ​ ​

할미꽃과 어머니의 노을 / 최 효 열

그림 : 박 인 선 ​ ​ 할미꽃과 어머니의 노을 / 최 효 열 ​ ​ 어머니는 살아서도 할미꽃, 굽어진 등 너머 팔순세월 마디마디 새겨진 사연 아버지 무덤에서 핀다 당신을 여의고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 감내하며 살아 온 길, 미운 정 고운 정 곱씹으며 푸념 담아 당신에게 올리는 잔 추억으로 피는 그리움이라고, 사랑이라고 살아서도 할미꽃으로 핀다 변화하는 세월 저 깊은 곳에 담겨진 보릿고개보다 외로움을 삭히셨을 눈물로 보낸 세월이 소리 없는 아픔으로 가득한데 산새 사랑가 오리나무에 걸터앉아 울고 오던 길 더듬는 어머니 머리위로 이는 붉은 노을이, 서산으로 어머니의 노을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