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꽃잎 14

슬픔이 빛어낸 빛깔 / 최경선

그림 / 방선옥 슬픔이 빛어낸 빛깔 / 최경선 저토록 도도한 빛깔을 본적 없다 했다 한때는 핓빛처럼 고운 그 꽃잎이 눈부셔 까닭 없이 울었다 했다 애타게 향기로운 척해보고 꿈꾸듯 별을 품어 토해내고 알 수 없는 허허로움에 목메던 시절이었노라고 빛바래고 바래다, 오지게 말라비틀어져 가는 그 모양이 당신 모습 같아 더 섧고도 서럽다 했다 하다 하다, 끝내는 열정과 슬픔 버무린 듯한 저 도도함이 눈물겹지 않으냐며 옹이 박힌 등허리 성스럽게 웅크리며 그녀 고요히 똬리를 튼다 최경선 시집 / 그 섬을 떠나왔다 *붙임성 댓글은 정중하게 사양합니다.

다리 / 정복여

그림 / 장순업 ​ ​ 다리 / 정복여 ​ ​ 강물 이라든지 꽃잎 이라든지 연애 그렇게 흘러가는 것들을 애써 붙들어보면 앞자락에 단추 같은 것이 보인다 가는 끝을 말아쥐고 부여잡은 둥긂 그 표면장력이 불끈 맺어놓은 설움에 꽁꽁 달아맨 염원의 실밥 ​ 바다로나 흙으로나 기억으로 가다 잠깐 여며보는 그냥...... 지금...... 뭐...... 그런 옷자락들 ​ 거기 흠뻑 발 젖은 안간힘의 다리가 보인다 ​ ​ ​ ​ 정복여 시집 / 체크무늬 남자 ​ ​ ​ ​ ​

바람의 말 / 마종기

그림 / 원 효 준 ​ ​ ​ ​ ​ 바람의 말 / 마종기 ​ ​ ​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 ​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는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 ​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 ​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 ​ ​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 ​ ​ *마종기 시인은 동화작가 마해송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

그 손 / 김 광 규

그림 / 김 정 숙 ​ ​ ​ ​ ​​ 그 손 / 김 광 규 ​ ​ ​ ​ ​ 그것은 커다란 손 같았다 밑에서 받쳐주는 든든한 손 쓰러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감싸주는 따뜻한 손 바람처럼 스쳐가는 보이지 않는 손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물과 같은 손 시간의 물결 위로 떠내려가는 꽃잎처럼 가녀린 손 아픈 마음 쓰다듬어 주는 부드러운 손 팔을 뻗쳐도 닿을락 말락 끝내 놓쳐버린 손 커다란 오동잎처럼 보이던 그 손 ​ ​ ​ ​ ​ 시집 / 시가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줄 것이다 ​ ​ ​ ​

회전문 앞에서 / 안 재 홍

그림 / 정 진 경 ​ ​ ​ ​ 회전문 앞에서 / 안 재 홍 ​ ​ ​ 꽃잎 하나 하늘거리며 떨어져 내린다 저 가뿐한 몸짓 회전문 앞에서 본다 ​ 나가고자 하나 다시 돌아온 제자리가 진정한 자유인지 모른다 내 안에 안녕이 있음을 떠나본 자들은 알리라 ​ 안에서 나가려 하고 밖에서 들어오려 애쓴다 ​ 안팎의 경계가 꽃그늘처럼 아슴아슴하다 ​ ​ ​ 안재홍 시집 / 무게에 대하여 ​ ​ ​ ​

국화 차를 달이며 / 문 성 해

그림 / 국중길 ​ ​ ​ ​ ​ 국화 차를 달이며 / 문 성 해 ​ ​ ​ 국화 우러난 물을 마시고 나는 비로소 사람이 된다 나는 앞으로도 도저히 이런 맛과 향기의 꽃처럼은 아니 될 것 같고 또 동구 밖 젖어드는 어둠 향해 저리 컴컴히 짖는 개도 아니 될 것 같고 ​ 나는 그저 꽃잎이 물에 불어서 우러난 해를 마시고 새를 마시고 나비를 모시는 사람이니 ​ 긴 장마 속에 국화가 흘리는 빗물을 다 받아 모시는 땅처럼 저녁 기도를 위해 가는 향을 피우는 사제처럼 텅텅 울리는 긴 복도처럼 고요하고도 깊은 가슴이니 ​ ​ ​ ​ *영남대 국문과 졸업 *1998년 매일 신문 신춘문예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 ​ ​ ​

가을이 오면 / 이 효

그림 / 권 현 숙​ ​ ​ ​ 가을이 오면 / 이 효 ​ ​ ​ 수국 꽃잎 곱게 말려서 마음과 마음 사이에 넣었더니 가을이 왔습니다 ​ 뜨거운 여름 태양을 바다에 흔들어 빨았더니 가을이 왔습니다 ​ 봄에 피는 꽃보다 붉은 나뭇잎들 마음을 흔드는 것은 당신 닮은 먼 산이 가을로 온 까닭입니다 ​ 멀리서 반백의 종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올 때면 무릎 꿇고 겸손하게 가을을 마중 나갑니다 ​ ​ ​ ​ 신문예 109호 수록 (가을에 관한 시)​ ​ ​ ​

마음이 깨어진다는 말 / 천 양 희

그림 : 조 태 영 ​ ​ 마음이 깨어진다는 말 / 천 양 희 ​ ​ 남편이 실직으로 고개를 숙인 그녀에게 엄마, 고뇌하는 거야? 다섯 살짜리 딸 아이가 느닷없이 묻는다 고뇌라는 말에 놀란 그녀가 고뇌가 뭔데? 되물었더니 마음이 깨지는 거야, 한다 꽃잎 같은 아이의 입술 끝에서 재앙 같은 말이 나온 이 세상을 그녀는 믿을 수가 없다 책장을 넘기듯 시간을 넘기고 생각한다 깨어진 마음을 들고 어디로 가나 고뇌하는 그녀에게 아무도 아무 말 해주지 않았다 하루 종일 길모퉁이에 앉아 삶을 꿈꾸었다 ​ ​ 시집 : 새벽에 생각하다 ​ ​ 그림 : 권 영 애

담장 안 목련 / 강 애 란

그림 : 정 금 상 ​ ​ 담장 안 목련 / 강 애 란 ​ 지난밤 담장 아래로 내려앉은 그녀 한껏 피었다가 몇 날이나 허허롭게 웃었을까 ​ 구름 속 달빛의 손길 그녀의 귓가를 입술을 두 뺨을 쓸어내릴 때 온몸 흔드는 꽃샘바람에 휘청거리며 몇 날이나 소리 없이 울었을까 ​ 떨어지는 꽃잎들 담장 안은 한철 머물다 가는 장례식장이다 ​ ​ 시집 : 조금 쉬어가며 웃어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