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정호승시집슬픔이택배로왔다 5

뒷모습 / 정호승

그림 / 소순희 ​ ​ ​ 뒷모습 / 정호승 ​ ​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답다고 이제는 내 뒷모습이 아름다워졌으리라 뒤돌아보았으나 내 뒷모습은 이미 벽이 되어 있었다 철조망이 쳐진 높은 시멘트 담벼락 금이 가고 구멍이 나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제주 푸른 바닷가 돌담이나 예천 금당실마을 고샅길 돌담은 되지 못하고 개나 사람이나 오줌을 누고 가는 으슥한 골목길 담쟁이조차 자라다 죽은 낙서투성이 담벼락 폭우에 와르르 무너진다 순간 누군가 담벼락에 그려놓은 작은 새 한마리 포르르 날개를 펼치고 골목 끝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나는 내 뒷모습에 가끔 새가 날아왔다고 맑은 새똥을 누고 갈 때가 있었다고 내 뒷모습이 아름다울 때도 있었다고 ​ ​ ​ ​ 정호승 시집 / 슬픔이 택배로 왔다 ​ ​ ​​ ​ ​

새에게 묻다 / 정호승

그림 / 남복현 새에게 묻다 / 정호승 사람들이 자꾸 나를 바보라고 한다 나는 내가 정말 바보인지 너무 궁금해서 우리집 아파트 베란다 헌식대에 모이를 주다가 어린 새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정말 바보냐고 새가 물 한모금 입에 물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바보라고 나는 비로서 내가 바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새들과 함께 맛있게 모이를 쪼아 먹기 시작했다 정호승 시집 / 슬픔이 택배로 왔다

모닥불 / 정호승

그림 / 심승보 모닥불 / 정호승 강가의 모닥불 위에 함박눈이 내린다 하늘의 함박눈이 모닥불 위에 내린다 모닥불은 함박눈을 태우지 않고 스스로 꺼진다 함박눈은 모닥불에 녹지 않고 스스로 녹는다 나는 떠날 시간이 되어 스스로 떠난다 시간도 인간의 모든 시간을 스스로 멈춘다 이제 오는 자는 오는 곳이 없고 가는 자는 가는 곳이 없다 인생은 사랑하기에는 너무 짧고 증오하기에는 너무 길다 정호승 시집 / 슬픔이 택배로 왔다

걸레의 마음 / 정호승

그림 / 장근헌 걸레의 마음 / 정호승 내가 입다 버린 티셔츠를 어머니는 버리기 아깝다고 다시 주워 걸레로 쓰신다 나는 걸레가 되어 집 안 청소를 하고 변기도 닦고 침대 모서리 먼지도 닦아낸다 어떤 날은 베란다에 떨어진 새똥도 닦아낸다 그렇게 걸레가 되고 나서부터는 누가 나더러 걸레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 더러운 곳을 깨끗하게 청소할 때마다 나를 걸레로 만드신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나는 다 해진 걸레로서 열심히 살아가면서 평생 나를 위해 사셨던 어머니의 걸레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 정호승 시집 / 슬픔이 택배로 왔다

가슴이 슬프다 / 정호승

그림 / 금채민 가슴이 슬프다 / 정호승 어린 새들이 단 한알의 모이를 쪼아 먹으려고 사방을 두리번 두리번거리고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재빨리 수십번이나 자리를 옮기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기어이 한알의 모이도 한모금의 물도 쪼아 먹지 못하고 검은 마스크를 쓴 인간이 두려워 포르르 어둠이 깃드는 저녁 하늘로 멀리 날아갈 때 가슴이 슬프다 정호승 시집 / 슬픔이 택배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