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과 어머니 / 이효 묵과 어머니 / 이효간병인이 사라진 날 척추가 불안한 어머니 집 딸만 보면 묵을 쑨다 수직 궤도 벗어난 꼬부라진 허리 싱크대에 매달려 추가 된다 끈끈한 묵 나무 주걱으로 세월만큼 휘젓는다 불 줄여라 엄마의 잔소리는 마른 젖 오래 저어라 끈기 있게 살라는 말씀 쫀득하다 어머니 묵 그릇 같은 유언 눈동자에 싸서 집으로 가져온다 풀어보니 검게 탄 일생이 누워 있다 입안에서 엄마 생각이 물컹거린다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문학이야기/자작시 2024.12.25
동물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정끝별 그림 / 최 석 원 동물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정끝별 소 눈이라든가 낙타 눈이라든가 검은 눈동자가 꽉 찬 눈을 보면 내가 너무 많은 눈을 굴리며 산 것 같아 남의 등에 올라타지 않고 남의 눈에 눈물 내지 않겠습니다 타조 목이라든가 기린 목이라든가 하염없이 기다란 목을 보면 내가 너무 많은 걸 삼키며 사는 것 같아 남의 살을 삼키지 않고 남의 밥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펭귄 다리라든가 바다코끼리 다리라든가 버둥대는 짧은 사지를 보면 나는 내가 더 많은 죄를 짓고 살 것 같아 우리에 갇혀 있거나 우리에 실려 가거나 우리에 깔리거나 우리에 생매장당하는 더운 목숨들을 보면 우리가 너무 무서운 사람인 것만 같아 시집 / 오늘의 시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 문학이야기/명시 2022.03.27
가을 편지 / 나호열 그림 / 노 숙 경 가을 편지 / 나호열 당신의 뜨락에 이름모를 풀꽃 찾아왔는지요 눈길 이슥한 먼 발치에서 촛불 떨어지듯 그렇게 당신을 바라보는 꽃 어느 날 당신이 뜨락에 내려오시면 이미 가을은 깊어 당신은 편지를 읽으시겠는지요 머무를 수 없는 바람이 보낸 당신을 맴도는 소리죽인 발자국과 까만 눈동자 같은 씨앗들이 눈물로 가만가만 환해지겠는지요 뭐라고 하던가요 작은 씨앗들은 그냥 당신의 가슴에 묻어 두세요 상처는 웃는다 라고 기억해 주세요 당신의 뜨락에 또 얼마마한 적막이 가득한지요 나호열 시인 * 1953년 충남 서천 출생 * 경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 1991년 《시와시학》 중견시인상 수상 * 2004년 녹색 .. 문학이야기/명시 2021.08.20
눈부처 / 정호승 그림 : 이 승 희 눈부처 / 정 호 승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그대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시집 :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문학이야기/명시 2021.02.05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 박 준 그림 : 김 정 수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 박 준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박준 시인 약력 * 출생 : 1983년, 서울 * 학력 : .. 문학이야기/명시 2021.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