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그림자 9

​낙화 / 조지훈

그림 / 이경희 ​ ​ ​낙화 / 조지훈​ ​ ​ ​ ​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 ​ ​ 시집 / 애송시 100편 ​ ​ ​ ​

그림자 / 천양희

그림 / 송태관 ​ ​ ​ ​ ​ 그림자 / 천양희 ​ ​ 마음에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마른가지 몇개 분질렀습니다 그래도 꺾이지 않는 건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오솔길에 듭니다 바람 부니 풀들이 파랗게 파랑을 일으킵니다 한해살이 풀을 만날 때쯤이면 한 시절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나는 그만 풀이 죽어 마음이 슬플 때는 지는 해가 좋다고 말하려다 그만두기로 합니다 오솔길은 천리로 올라오는 미움이란 말을 지웁니다 산책이 끝나기 전 그늘이 서늘한 목백일홍 앞에 머뭅니다 꽃그늘 아래서 적막하게 웃던 얼굴이 떠오릅니다 기억은 자주 그림자를 남깁니다 남긴다고 다 그림자이겠습니까 '하늘 보며 나는 망연히 서 있었다' 어제 써놓은 글 한줄이 한 시절의 그림자인 것만 같습니다 ​ ​ ​ ​ *목백일홍 (배롱나무) 배롱나..

바람의 말 / 마종기

그림 / 정우민 ​ ​ ​ ​ 바람의 말 / 마종기 ​ ​ 우리 모두가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 생각지는 마. ​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 ​ 애송시 100편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1 ​ ​ ​ ​ ​ ​

바람의 말 / 마종기

그림 / 원 효 준 ​ ​ ​ ​ ​ 바람의 말 / 마종기 ​ ​ ​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 ​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는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 ​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 ​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 ​ ​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 ​ ​ *마종기 시인은 동화작가 마해송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

한 잎의 여자 / 오 규 원

그림 / 권 신 아 ​ ​ ​ 한 잎의 여자 / 오 규 원 ​ ​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 ​ ​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

비애에 대하여 / 나 호 열

그림 / 유 영 국 ​ ​ 비애에 대하여 / 나 호 열 늙은 베틀이 구석진 골방에 앉아 있다 앞뜰에는 봄꽃이 분분한데 뒤란엔 가을빛 그림자만 야위어간다 몸에 얹혀졌던 수많은 실들 뻐마디에 스며들던 한숨이 만들어내던 수만 필의 옷감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수동태의 긴 문장이다 간이역에 서서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급행열차의 꼬리를 뒤따라가던 눈빛이 마침표로 찍힌다 삐거덕거리머 삭제되는 문장의 어디쯤에서 황토길 읍내로 가던 검정고무신 끌리는 소리가 저무는 귀뚜라미 울음을 닮았다 살아온 날 만큼의 적막의 깊이를 날숨으로 뱉어낼 때마다 베틀은 자신이 섬겼던 주인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엄불레라 창간호 (2021) ​ ​ ​ ​ ​

늦은 오후에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늦은 오후에 / 이 효 ​ 수국의 환한 미소를 꺾어 유리잔에 꽂아 놓았다 내 사랑을 저울에 올려보니 눈금이 울고 있다 ​ 마음에 이름을 담아 너를 안아보았지만 은빛 물결처럼 얇은 내 마음 투명 유리잔에 비친다 ​ 창틈으로 들어오는 빛 붉은 수국은 몸을 기댄다 미소를 꺾어버린 나는 종일 네 그림자 곁을 맴돈다 ​ 환한 미소는 초록 날개를 달아줄 때 더욱 곱게 피어오른다는 것을 너무 늦은 오후에 알았다

연어 / 정 호 승

연어 / 정 호 승 바다를 떠나 너의 손을 잡는다 사람의 손에게 이렇게 따뜻함을 느껴본 것이 그 얼마 만인가 거친 폭포를 뛰어넘어 강물을 거슬러올라가는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단지 한 마리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누구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상 깊었다 이제 나는 너에게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강으로 간다 울지 마라 인생을 눈물로 가득 채우지 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은 아름답다 오늘 내가 꾼 꿈은 네가 꾼 꿈의 그림자일 뿐 너를 사랑하고 죽으러 가는 한낮 숨은 별들이 고개를 내밀고 총총히 우리를 내려다본다 이제 곧 마른 강바닥에 나의 은빛 시체가 떠오르리라 배고픈 별들이 오랜만에 나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