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 1363

촉도

촉도(蜀道) / 나 호 열 경비원 한씨가 사직서를 내고 떠났다 십 년 동안 변함없는 맛을 보여주던 낙지집 사장이 장사를 접고 떠났다 이십 년 넘게 건강을 살펴주던 창동피부비뇨기과 원장이 폐업하고 떠났다 내 눈길이 눈물에 가닿는 곳 내 손이 넝쿨손처럼 뻗다 만 그곳부터 시작되는 촉도 손때 묻은 지도책을 펼쳐놓고 낯선 지명을 소리 내어 불러보는 이 적막한 날에 정신 놓은 할머니가 한 걸음씩 밀고 가는 저 빈 유모차처럼 절벽을 미는 하루가 아득하고 어질한 하늘을 향해 내걸었던 밥줄이며 밧줄인 거미줄을 닮았다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 퇴로를 끊어버린 촉도 거미에게 묻는다 * 시집 『촉도』 (2015)

뼈에 새긴 그 이름

뼈에 새긴 그 이름 / 이 원 규 그대를 보낸 뒤 내내 노심초사하였다 행여 이승의 마지막일지도 몰라 그저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기만 해도 갈비뼈가 어긋나고 마른 갈잎이 흔들리며 그 잎으로 그대의 이름을 썼다 청둥오리 떼를 불러다 섬진강 산 그림자에 어리는 그 이름을 지우고 벽소령 달빛으로 다시 전서체의 그 이름을 썼다 별자리들마저 그대의 이름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바꿔 앉는 밤 화엄경을 보아도 잘 모르는 활자들 속에 슬쩍 그 이름을 끼워서 읽고 폭설의 실상사 앞 들녘을 걸으면 발자국, 발자국들이 모여 복숭아뼈에 새긴 그 이름을 그리고 있었다 길이라면 어차피 아니 갈 수 없는 길이었다.

구름에게

구름에게 / 나호열 구름이 내게 왔다 아니 고개를 들어야 보이는 희미한 입술 문장이 될 듯 모여지다가 휘리릭 새떼처럼 흩어지는 낱말들 그 낱말들에 물음표를 지우고 느낌표를 달아주니 와르르 눈물로 쏟아지는데 그 눈물 속에 초원이 보이고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의 저녁이 보인다 구름이 내게 왔다 하나이면서 여럿인, 이름을 부르면 사슴도 오고 꽃도 벙근다 구름의 화원에 뛰어든 저녁 해 아, 눈부셔라 한 송이 여인이 붉게 타오른다, 와인 한 잔의 구름 긴 머리의 구름이 오늘 내게로 왔다

경숙이 (자작 시)

경숙이 / 이 효 경춘선 숲길 끝에 하얀 대문이 있는 집 텃밭에 감자랑 고구마랑 토마토가 달처럼 웃는다 텃밭 둘레에는 어린 코스모스 자란다 이년아! 먹지도 못할 코스모스 왜 심어 놓았니? 달맞이꽃 닮은 친구는 마을 사람 보란다 애호박, 상추 따놓았으니 호박 부침개 먹고 가란다 경숙이표 계절 밥상 한 상 받아 보란다 이년아! 너나 많이 먹어라 친구가 설거지통에 손을 담그는 것이 싫어 하얀 대문을 나온다 경춘선 숲길에는 더 이상 기차가 달리지 않는다 그녀는 내 마음에 속에 터널 하나 숭숭 뚫어 놓았다 한 여름이 곱게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