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님이 오시는 날 / 이 효 그림 / 신 종식 눈님이 오시는 날 / 이 효 불온한 세상 곱게도 오시네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인간은 사랑인 줄 모르고 밟고 가네 하얀 발자국 위에 너와 내가 서로 엉켜 용서를 배운다 일기장이 하얗다 12월의 마지막 눈이 술에서 깬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문학이야기/자작시 2022.12.15
드라이플라워 / 이 효 그림 / 김형기 드라이플라워 / 이 효 내가 붉은 것은 당신을 부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가시가 있는 것은 나를 건들지 말라는 까닭입니다 언젠가는 타오르던 그 사랑도 시들겠지만 당신이 떠나면 슬픔 속 나는 마른 가시가 됩니다 사랑이 떠나도 견디게 하는 것은 향기가 남아서겠지요 오늘, 슬픔을 곱게 말립니다 오! 장미여 문학이야기/자작시 2022.12.14
그, 날 / 이 효 그림 / 김 연경 그, 날 / 이 효 흰 눈이 쌓인 산골짝 한 사내의 울음소리가 계곡을 떠나 먼바다로 가는 물소리 같다 하늘 향해 날개를 폈던 푸른 나뭇잎들 떨어지는 것도 한순간 이유도 모른 채 목이 잘린 직장 어린 자식들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어 하얀 눈발에 내려갈 길이 까마득하다 어머니 같은 계곡물이 어여 내려가거라 하얀 눈 위에 길을 내어주신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문학이야기/자작시 2022.12.13
달걀부침과 미스코리아 / 이 효 그림 / 이기호 달걀부침과 미스코리아 / 이 효 어린 딸내미 밥 수저 위에 올려주던 노란 달걀부침 볼은 주먹만 한 풍선 꼭꼭 씹어라 하나 둘 셋··· 서른 꿀꺽 아이고 우리 딸 미스코리아 되겠네 어른이 되어서 노란 꽃밭이 되라는 아버지 말씀 프라이팬 위에서 자글거린다 나는 왜, 아직도 미스코리아가 되지 못했나 볼에 노른자 주룩 흐른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문학이야기/자작시 2022.12.12
작약이 폈어 / 이 효 그림 / 김 영 희 작약이 폈어 / 이 효 엄마는 작약을 보며 전화기에 귀를 건다 엄마, 왜? 작약이 얼굴을 내민다 발자국 소리가 사라진 엄마의 마당 숙아, 준아, 덕아, 떨어지는 꽃잎에 불안한 내일이 여위어간다 작, 약, 이, 폈, 어, 늘어지는 녹음 테프 정원 한가득 자식들 이름은 색을 입는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문학이야기/자작시 2022.12.12
나침반 / 이효 그림 / 송민자 나침반 / 이효 푸르릉거리는 나비 한 마리 아버지 배낭 안에서 찾는 길 더덕이랑, 쑥이랑, 곰취랑 산등성에 봄내음 캔다 아버지 실웃음 링거에 걸고 하얀 꽃잎 위에 누운 날 이 빠진 풍금 소리 딸내미 가슴 음표 없는 울음 아버지의 배낭 속 지구만 한 나침반 숲에서 길을 잃은 발자국 소리가 절벽에 매달릴 때 초침 같은 남자의 미소 아버지 얼굴에 앉은 나비 나침반 위에 옮겨 앉으면 그 자리에 숲길이 환하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문학이야기/자작시 2022.12.11
당신의 숨 한 번 / 이 효 해설 ‘숨’과 ‘쉼’의 풍경을 읽다 나호열 (시인 · 문학 평론가)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보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하나는 기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며, 또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기적奇跡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인과의 법칙을 넘어서서 이루어지는 것, 어떤 절망적 상황이 순식간에 극복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기적이 필요하지 않은 평온한 삶이다. 기적이 요구되지 않는 삶, 언제든 쉬고 잠잘 수 있는 집이 있고, 언제든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넉넉한 양식糧食이 비축되어 있는, 어찌 보면 판에 박힌 쳇바퀴를 돌리는 삶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 문학이야기/자작시 2022.12.09
수선화는 피었는데 / 이 효 수선화는 피었는데 / 이 효 창문을 열어 놓으니 봄바람이 곱게 머리를 빗고 마당에 내려앉는구나 마당에 노란 수선화가 활짝 피었는데 창문에 걸터앉아 꽃을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구름처럼 간데없구나 수선화도 서러운지 봄 노래를 부르려다 하늘에 쉼표 하나 그린다 꽃버선 신고 떠나신 하늘길 어머니 얼굴 수선화처럼 화안하다 어머니! 일 년 반 동안 암 투병을 하셨습니다. 한 통에 전화를 받았다. 쓰러진 나무를 세워 보았지만 나무는 뜨거운 화장터를 찾아야 했다. 코로나로 서울에는 회장 터가 없단다. 태백까지 다녀오란다. 미친 세상인지는 알았지만 내가 먼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어머니 병상에 누워 계실 때 오미크론 확산이 심했다.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 문학이야기/자작시 2022.03.18
사진관 앞에서 / 이 효 그림 / 용 한 천 (개인전) 사진관 앞에서 / 이 효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던 어린 날 붉은 벽돌 사진관 앞에 걸린 낯선 가족사진 한장 나비넥타이 매고 검정 구두 신은 사내아이 내 볼에 붉은 복숭아꽃 핀다 그 많던 가족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여윈 어깨의 검정 구두 남자도 홀로 액자 속을 걸어 나온다 사진관 불빛이 사라진 자리 젖은 바람 텅 빈 액자 속을지나 내 마음 벌판에 걸린다 출처 / 신문예 (106호) 문학이야기/자작시 2021.09.27
가을이 오면 / 이 효 그림 / 권 현 숙 가을이 오면 / 이 효 수국 꽃잎 곱게 말려서 마음과 마음 사이에 넣었더니 가을이 왔습니다 뜨거운 여름 태양을 바다에 흔들어 빨았더니 가을이 왔습니다 봄에 피는 꽃보다 붉은 나뭇잎들 마음을 흔드는 것은 당신 닮은 먼 산이 가을로 온 까닭입니다 멀리서 반백의 종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올 때면 무릎 꿇고 겸손하게 가을을 마중 나갑니다 신문예 109호 수록 (가을에 관한 시) 문학이야기/자작시 2021.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