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달빛 문장 / 김 정 임

그림/ 이 선 희 ​ ​ ​ 달빛 문장 / 김 정 임 ​ ​ ​ 운주리 목장에 달이 뜨자 쇠똥구리 한 마리 길 떠나기 시작하네 제 몸보다 수십 배 무거운 쇠똥을 빚어서 온몸으로 굴려서 가네 ​ 작은 몸이 힘에 겨워 쇠똥에 매달려 가는 것 같네 문득 멈추어 달빛을 골똘히 들여다보네 달빛 아래서만 제 길을 찾는 두 눈이 반짝이네 마치 달빛 문장을 읽는 것 같이 보이네 ​ 무슨 구절일까 밑줄 파랗게 그어가며 반복해서 읽고 또 읽어가네 갑옷 속의 붉은 심장이 팔딱팔딱 뛰네 어느 날 내게 보여준 네 마음에 밑줄 그으며 몇 번씩 읽어내려 가던 눈부신 순간이 생각났네 ​ 맑은 바람 한 줄기가 쇠똥구리 몸 식혀주네 태어나고 죽어야 할 집 한 채 밀고 가네 드넓은 벌판에 아름다운 집 한 채 밀고 가네 그날 네 마음이 내..

어머니 / 오 세 영

그림/ 김 계 희 ​ ​ ​ 어머니 / 오 세 영 ​ ​ ​ 나의 일곱 살 적 어머니는 하얀 목련꽃이셨다. 눈부신 봄 한낮 적막하게 빈 집을 지키는, ​ ​ 나의 열네 살 적 어머니는 연분홍 봉선화꽃이셨다. 저무는 여름 하오 울 밑에서 눈물을 적시는, ​ ​ 나의 스물한 살 적 어머니는 노오란 국화꽃이셨다. 어두운 가을 저녁 홀로 등불을 켜 드는, ​ ​ 그녀의 육신을 묻고 돌아선 나의 스물아홉 살, 어머니는 이제 별이고 바람이셨다. 내 이마에 잔잔히 흐르는 흰 구름이셨다. ​ ​ ​ 오세영 시집 / 시는 나에게 살라고 한다 ​ ​ ​

사랑이 올 때 / 나 태 주

그림 / 염 복 순 ​ ​ ​ 사랑이 올 때 / 나 태 주 ​ ​ 가까이 있을 때보다 멀리 있을 때 자주 그의 눈빛을 느끼고 ​ 아주 멀리 헤어져 있을 때 그의 숨소리까지 듣게 된다면 분명히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 의심하지 말아라 부끄러워 숨기지 말아라 사랑은 바로 그렇게 오는 것이다 ​ 고개 돌리고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 ​ ​ 시집 / 나태주 대표 시선집 ​ ​ ​

열네 살이 묻고 철학이 답한다.

그림 / 이 명 옥 ​ ​ ​ 열네 살이 묻고 철학이 답한다. ​ ​ 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을까? 나는 여동생보다 반려견이 있었으면 하고 더 바랐다. 여동생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럽다고 모든 사람이 말해서 서운하기도 했다. 내가 제일 사랑스럽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난주에 동생은 무척 열이 났고, 내가 잠시 동생을 돌봐 주었다. 볼이 빨갛고 마치 삶은 감자처럼 뜨거운 동생은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었다. 나는 몰래 여동생에게 뽀뽀해 주었다. 그리고 혹시 나의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동생이 아픈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 ​ ​ ​ 감정은 사랑 안에 깃들지만 사람은 자신의 사랑 안에 살아간다. - 마르틴 부버 - ​ ​ 책 / 질문의 책 ​ ​ ​

잊어버립시다 / 세라 티즈데일

그림 / BEA MEA SOON ​ ​ ​ 잊어버립시다 / 세라 티즈데일 ​ ​ 잊어버리세요. 꽃을 잊듯이, 한때 금빛으로 타오르던 불을 잊듯이, 영원히 아주 영원히 잊어버리세요, 시간은 친절한 벗, 우리를 늙게 하지요. ​ 누군가 물으면, 이렇게 말하세요. 오래 오래전에 잊었노라고, 꽃처럼, 불처럼, 오래전에 잊혀진 눈 위에 뭉개진 발자국처럼 잊었노라고. ​ ​ ​ 시집 / 시를 읽는 오후 ​ ​ ​ ​

괜찮아 / 한 강

그림 / 임 승 녀 ​ ​ ​ 괜찮아 / 한 강 ​ ​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

할아버지 할머니 / 강 예 리 (고2)

그림 / 윤 지 윤 ​ ​ ​ 할아버지 할머니 / 강 예 리 (고2) ​ ​ 초등학교 어릴 적, 수업 중 부리나케 달려간 병원 그곳 침대 위에 할아버지가 누워 계셨다 ​ 그 후론 걷는 것도 일어서는 것도 혼자선, 할 수 없게 되신 할아버지 ​ 그런 할아버지를 간병하시느라 옆집 할머니 집 마실 한번 가지 않으신 할머니 8년이란 긴 세월 불평 한번 없이 매일매일 틀니 닦아주고 대소변 가려주시는 할머니 ​ 그런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할매, 내가 다 나으면 호강 시켜줄게" 하시면 ​ 그럼 할머니는 "밥이나 먹어" 하신다. ​ ​ ​ 시집 : 36.4° C ​ ​

화살과 노래 / 핸리 워즈워스 롱펠로

그림/ 강 수 영 ​ ​ ​ 화살과 노래 / 핸리 워즈워스 롱펠로 ​ ​ 화살을 허공에 쏘아 보냈지. 땅에 떨어졌겠지만, 어딘지 알지 못했어; 너무 빨리 날아가는 화살을, 내 눈이 쫓아갈 수 없었지. ​ 노래를 허공에 띄워 불렀지. 땅에 떨어졌겠지만, 어딘지 알지 못했어; 누가 날아가는 노래를 따라갈 만큼 예리하고 강한 눈을 갖고 있겠어? ​ 오래, 오래 뒤에, 어느 참나무에서 아직도 부러지지 않고 박혀 있는 화살을 보았지; 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친구의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어. ​ ​ 시집 / 시를 읽는 오후 ​ ​

접시꽃 당신 / 도 종 환

그림 / 강 계 진 ​ ​ 접시꽃 당신 / 도 종 환 ​ ​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 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짖지 않으며 살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어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